행정 현장에 AI가 도입되면서 공무원의 역할은 점점 ‘판단자’에서 ‘시스템 운영자’로 이동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렇다면 AI 행정은 공무원의 재량권을 실제로 줄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재량의 형태 자체를 바꾸고 있는 것일까.

공무원 재량권은 왜 행정에서 중요한 개념인가
공무원의 재량권은 행정의 비효율이나 자의성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본래 재량권은 법과 제도가 포착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완하기 위해 존재해 왔다. 행정은 규칙에 의해 작동하지만, 사회의 모든 상황을 규칙으로 미리 설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법령과 지침이 정한 범위 안에서 공무원이 개별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여지가 필요했고, 이것이 재량권의 핵심적인 기능이었다. 특히 복지, 민원, 현장 행정 영역에서는 재량권의 역할이 더욱 중요했다.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개인의 삶의 맥락은 다르기 때문에, 공무원의 판단은 행정 결과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재량은 단순한 개인적 판단이 아니라, 제도의 경직성을 완화하고 행정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는 장치로 작동해 왔다.
그러나 재량권은 동시에 문제의 대상이 되어 왔다. 판단의 일관성이 떨어질 수 있고, 담당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으며, 때로는 불공정이나 특혜의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행정은 점점 더 표준화와 규칙 중심으로 이동했고, AI 행정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서 등장했다. AI는 동일한 기준을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고, 인간의 감정이나 편견에서 자유롭다는 점에서 재량권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처럼 인식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재량권이 단순히 줄어드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있는지는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AI 행정은 재량권을 ‘제거’하기보다 판단의 위치를 이동시킨다
AI 행정이 도입되면 공무원의 개별 판단은 분명히 줄어든다. 신청서 검토, 자격 판별, 위험도 평가 등 많은 과정이 시스템에 의해 자동 처리된다. 이로 인해 공무원은 더 이상 개별 사례를 처음부터 끝까지 판단하지 않게 되고, 시스템이 제시한 결과를 확인하고 집행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 변화는 재량권의 축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재량이 행사되는 위치가 이동한 것에 가깝다. 과거에는 개별 공무원이 현장에서 재량을 행사했다면, 이제는 그 재량이 제도 설계 단계와 시스템 설계 단계로 이동한다. 어떤 데이터를 사용할 것인지, 어떤 기준을 우선할 것인지, 예외를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이미 시스템에 내장된다.
즉, 재량은 사라지지 않고 코드와 규칙의 형태로 고정된다. 문제는 이 재량이 더 이상 개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번 설정된 기준은 반복적으로 적용되고, 현장에서 이를 조정할 수 있는 여지는 제한된다. 공무원은 시스템의 판단을 수정하기보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절차를 충실히 이행하는 역할에 가까워진다. 이로 인해 공무원의 전문성 또한 다른 방향으로 재정의된다. 현장 이해와 상황 판단 능력보다는, 시스템 운영 능력과 규정 준수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 이는 행정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지만, 동시에 행정이 현실과 어긋나는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결국 AI 행정은 재량권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재량을 중앙집중적이고 사전적인 형태로 재배치한다. 이 변화가 긍정적인지 여부는 재량의 이동이 얼마나 투명하고 책임 있게 이루어지는지에 달려 있다.
AI 행정 시대에 공무원 재량은 어떻게 재정의되어야 하는가
AI 행정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중요한 질문은 재량권을 유지할 것인가, 줄일 것인가가 아니다. 핵심은 재량권을 어떤 방식으로 재정의할 것인가에 있다. AI가 계산과 분류를 담당하는 영역이 넓어질수록, 공무원의 역할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다.
첫째, 공무원의 재량은 예외를 만드는 권한이 아니라, 시스템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권한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AI가 제시한 결과를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에 머문다면, 공무원은 단순한 전달자가 된다. 반대로 그 결과가 어떤 기준과 논리에 따라 도출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시민의 질문에 응답할 수 있다면 재량은 새로운 형태로 기능할 수 있다.
둘째, 재량은 시스템 설계와 운영에 대한 참여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현장 공무원은 제도의 작동 결과를 가장 먼저 경험하는 집단이다. 따라서 AI 행정 시스템의 문제점을 피드백하고, 기준 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재량이 설계 단계에서만 행사된다면, 현장의 경험은 반영되기 어렵다.
셋째, AI 행정에서는 재량권만큼이나 책임의 구조가 중요해진다. 공무원이 시스템 결과를 그대로 집행할 때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재량이 줄어든 만큼 책임도 줄어드는 구조가 된다면, 행정은 책임 없는 집행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AI 행정에서는 재량과 책임이 함께 재설계되어야 한다.
AI 행정은 공무원의 재량권을 단순히 줄이지 않는다. 대신 재량의 성격과 행사 방식, 그리고 책임의 위치를 바꾼다. 이 변화가 행정의 질을 높일지, 아니면 행정을 더 경직되게 만들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AI가 행정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이 AI를 어떻게 통제하고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 공무원의 재량권은 축소될 수도,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도 있다.